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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10·27법난 문예공모전

2018.06.15(금) - 2018.09.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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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우수] 호국법난이라 불러야 하는 까닭 -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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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12-08 11:40 조회1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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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법난(護國法難)’이라 불러야 하는 까닭

김성준

 

 

1. 틱광둑의 심장

무덥고 습한 베트남의 6월, AP 특파원 말콤 브라운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사이공 시내의 교차로를 지나고 있었다. 이 나라의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는 그 정치만큼이나 사람을 갑갑하게 했다.

고딘 디엠은 정권을 잡자마자 일방적으로 불교를 탄압했고, 그 탄압에 맞서 불교신도들이 일어날수록 더 거칠게 잡초처럼 짓밟아버렸다. 도대체 왜? 아직 베트남의 실정에 대해 훤히 알지 못하는 말콤 브라운은 그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럽의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이나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십자군전쟁은 팽팽히 맞서는 두 종교 세력 간의 충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힘을 쥔 권력자는 대개 권좌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저항세력을 억누른다. 처음에는 채찍으로 길을 들이고, 그 다음엔 당근으로 회유하기 마련이다. 이게 동서고금에 통하는 독재의 법칙이다. 그러나 저항할 힘도 수단도 의지도 없는, 그것도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스님들을 총칼로 다스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말콤 브라운이었지만, 불교도는 이 세계를 ‘공(空)’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어려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서구의 기자로서는 해득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불교도는 권력이나 부유함을 두고 헛되이 세속에서 다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베트남의 독재자는 불교도를 잔인하게 탄압했던 것이다.

그때 저만치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무슨 사건이 터졌나 싶어 말콤 브라운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손에 쥐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순간 그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잠시 잊고 말았다.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정좌한 채 스님이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울부짖었지만 감히 그 불을 끄고 스님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말콤 브라운이 말로만 듣던 소신공양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워 부처에게 바치는 것, 즉 진리와 진실을 위해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맨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말콤 브라운은 급히 셔터를 누르면서 옆에 있던 베트남인에게 물었다.

베트남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틱광둑 스님이십니다! 앞으로 넘어지면 희망이 없는 것이고, 뒤로 넘어지면 우리가 승리하여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앞으로 넘어지면 희망이 없고, 뒤로 넘어지면 승리할 것이라고? 이건 또 무슨 신비로운 말인가! 하지만 불에 타면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은 틱광둑 스님은 기어이 뒤로 넘어져 승리를 약속했다. 이 처참하지만, 숭고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절규했다.

말콤 브라운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베트남의 불교탄압의 참상을 서방세계에 알렸다.

민심의 동요를 걱정한 베트남 정권은 틱광둑 스님의 심장을 없애려 했지만, 그것은 불로도 타지 않았고, 황산으로도 녹지 않았다 한다.

없앨 수 없는 틱광둑 스님의 심장은 꺾을 수 없는 저항의 상징이 되어 반정부 시위의 펄떡거리는 심장이 된다. 틱광둑 스님의 뒤를 이어 소신공양을 하는 스님들이 연일 나왔고, 그 뒤로 시민과 학생은 물론이고 공무원들까지 반정부 시위에 힘을 보탠다. 결국 디엠의 독재정권은 붕괴했다. 디엠 정권이 보유했던 엄청난 물량의 무기를 합한 질량은 얼마였을까? 고딘 디엠이 사병처럼 거느린 군경의 합은 몇이었을까? 그것이 어느 정도였든, 주먹 크기의 심장을 꺾지는 못했던 것이다.

틱광둑 스님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불교탄압에 맞서 가장 불교적이고 가장 평화로운 방식으로 저항했다. 틱광둑 스님은 아무도 해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마음의 분노와 원망마저 불길에 던져버렸다. 다만 자신을 태워 부처님께 바쳤다. 그것이면 족했다. 가장 불교적인 방식, 그것이 법난을 대하는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 우리에게도 저 비슷한 사례가 있다. 독재정권에 의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불교탄압을 가장 불교적인 방식으로 묵묵히 견뎌낸 ‘10·27 법난’이 그것이다.

 

 

2. 법난의 역사와 ‘10·27 법난’의 특이성

1980년 10월 27. 우리 불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혹독한 시련을 맞게 된다. 그 탄압의 강도와 잔인성과 무도함과 동원된 인력에 있어서 말 그대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초에도 불교핍박이 있었고, 고려 무신정권 때도 불교를 탄압한 적이 있었다. 중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이른바 ‘삼무일종법난(三武一宗-法難)’, 즉 네 명의 황제가 불교를 박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법난들은 ‘10·27 법난’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고려 최씨정권에 의한 불교탄압은 일종의 정치적 격랑에 의한 것일 뿐 집권자 최충헌이 불교 자체를 혐오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불교도였다. 조선 초의 숭유억불은 정치·경제·사회적 헤게모니가 바뀌는 과정에서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가 구(舊) 권력을 밀어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즉 불교를 누름으로써 고려의 정신을 도려내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인 유교를 이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의 배불정책은 불교에 대한 반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조선의 왕과 대비, 왕후 등이 대궐 내에 법당을 모시고 스님을 모셨으며, 세조는 간경도감까지 설치하지 않았던가. 즉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억불조차도 단순히 정책적인 선택일 뿐이었지, 내심으로는 불교를 숭앙했던 것이다. 중국의 ‘삼무일종법난’은 조선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불교라는, 인도에서 비롯하여 전래된 종교와 기존의 중국 토착 종교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 종교와 신 종교의 갈등은 신 종교인 불교가 토착종교의 세력을 밀어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그만큼 불교가 많은 사람들의 견고한 지지를 받았다는 걸 방증한다. 요약하자면, 우리 역사상의 법난은 정책적·정치적 선택이었고, 중국의 법난은 불교라는 신흥 종교가 민심의 사랑을 받으며 거대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우리와 중국은 공통적으로 불교를 사랑했으며, 역설적이게도 불교를 사랑했기에 법난이 일어났던 셈이다.

하지만 10·27 법난은 그 앞서 언급한 사례들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탄압의 규모와 잔인성도 다르다. 오히려 베트남 디엠 정권이 틱광둑 스님을 소신공양으로 몰았던 그런 류의 법난과 닮았다. 아니 그 방식이 더 저열한 데가 있다. 적어도 디엠 정권은 스님을 부패의 상징으로, 사찰을 더러움의 복마전(伏魔殿)으로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디엠 정권은 불교를 군홧발로 짓밟는 데만 그쳤다 뿐이지, 불교의 명예와 미래까지 빼앗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속의 중생보다 더 돈에 눈이 멀고 욕심으로 썩어문드러진 스님은 더 이상 부처의 제자일 수가 없다. 그런 가짜 중이 모인 불교는 더 이상 종교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청산해야 할 사회악인 것이다. 신군부가 ‘기획’한 한국 불교는 그런 모습이었다. 신군부가 1980년에 3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자행한 법난은 불교의 명예를 훼손하고 찢어발김으로써 불교의 미래까지 싹을 자르려는 획책이었다.

3만의 군경 병력이라면 소국과 전쟁을 치르고도 남는다. 그 엄청난 병력은 휴전선과 치안일선 대신 전국 5,000여개의 사찰에 투입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한민국의 적이 스님이고, 사찰은 적의 본거지라는 뜻 아닌가? 외적을 물리치라고 있는 병력은 2,000명이 넘는 스님들을 연행하여 고문했다. 적어도 당시로서는 스님들이 외적이었나 보다.

도대체 신군부는 왜 그랬을까? 아무런 힘도 무기도 없고 저항할 의지도 없는 스님들을 왜 납치하다시피 연행하여 무참히 고문하고 그 명예를 짓밟았을까?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진상규명위원회는 그 답으로 “신군부에 비우호적인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됐다”고 제시한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스님은 공교롭게도 1980년 4월에 취임했다. 신군부가 한창 권력의 기초공사를 다지던 때였다. 신군부는 사회악 일소 등의 구호를 앞세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전 국민이 벌벌 떨며 부동자세로 옴짝달싹 못할 때였다. 이때 조계종 총무원은 ‘전한국불교회’와 ‘대한불교총연합회’와는 달리 국보위를 지지하지 않았다. 두터운 신망을 받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지지 선언을 해주면 ‘참 좋은 그림’이 나오겠지만, 월주스님은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고 종단을 자율적으로 운영하여 자체적으로 정화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빨갱이’로 보일 법한 결단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빨갱이’로 보이면 그 대상은 정말 ‘빨갱이’가 되어야 한다. 그게 그 시대의 엄혹한 이분법이었다.

신군부는 종교마저도, 유구한 우리 역사와 함께해온 불교마저도 군홧발로 간단히 밟아버렸다. 불교마저 그럴진대 일반 국민은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그들은 사회의 모든 분야를 ‘(말을 들으면) 자기 편’, ‘(말을 안 들으면) 적’이라는 식으로 이분화 하였고,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조계종 총무원은 그 표적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바로 저런 점에서 10·27 법난의 특이점이 있다. 첫째, 다른 법난들과는 달리 10·27 법난에는 불교에 대한 권력의 증오가 있었다. 그 증오는 조계종 총무원이 순종을 거부하자마자 즉시 발동한 것이었다. 둘째, 차가운 창검 앞에서 모두가 숨죽이고 넙죽 엎드려 있을 때 불교계가 앞장서 저항했다. 그리고 그 저항의 방식이 틱광둑 스님처럼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낼 정당성을 확보했다. 셋째, 호국불교와 10·27 법난의 연관성을 꼽을 수 있다. 국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호국불교’는 세계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 불교만의 특장이다. 또 그것이 불교가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기나긴 독재에 이어 또다시 신군부에 의해 암흑기에 접어들려고 할 때, 누구는 절망했고, 누구는 엎드렸고, 또 누구는 저항했다. 그 어두운 시절에 불교계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신군부에 맞섰다. 공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은 겨울이 되어 봐야 안다고 했다. 겨울이 깊을수록 상록수가 더 푸르듯이 양심이 위협받는 순간일수록 시비를 분명히 하고 옳음을 확고히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진 이들이 있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늘 그런 책무를 다해왔고, 10·27 법난도 그 의무를 수행하다가 벌어진 참화다.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10·27 법난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는지, 스님들과 불교종단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지 실감하기 힘들다. 다만, 당시 월정사 부주지로 계셨던 원행스님의 수필을 통해 그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원행스님이 겪으셨던 잔인한 고문과 억울한 일은 비단 그분만이 겪은 불행이 아닐 것이다. 그 슬픈 일은 10·27 법난의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소에서 뽑아낸 털은 그것이 한 가닥의 털일지라도 다른 털들과 똑같이 그 소의 털이다. 다른 털을 뽑아내도 그 털과 똑같은 색깔일 것이며, 똑같은 모양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행스님의 일은 10·27 법난의 실례 중 하나일 뿐이다. 조계종이 겪었던 모든 참상을 다 보고 들을 수는 없지만, 원행스님의 사례 하나만 보고서도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3. 호국불교와 법난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수강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내 머릿속을 늘 따라다니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불교는 불살생을 주요한 계율로 삼는데, 우리 불교는 호국불교라 불릴 만큼 외적의 침탈 앞에 무기를 들고 싸웠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부처의 눈에서 보자면 모두 소중한 생명인데, 어째서 한국 불교는 일본이나 중국에 맞서 무기를 들었나? 그들을 죽이는 것은 불살생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교수님께 이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도 잘 받아주시는 인자한 분이셨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괜히 그분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대신 직접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나름의 답은 10·27 법난을 통해 얻게 되었다.

압제에 저항하여 소신공양한 틱광둑 스님의 행위는 남을 죽이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를 죽인다는 점에서 그 역시 일종의 살생이다. 그러나 그 숭고한 행위를 살생이라고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을 태워 부처에게 바치는 것은 더 큰 가치를 위해 더 작은 가치를 포기하겠다는 실천이며, 오로지 부처의 법에 의지하여 살 것이되 그 외의 것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용맹정진의 각오를 표현한 것이며, 선과 양심이 위기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피해로써 최대한의 중생을 구제코자 하는 살신성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국불교 역시 그렇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차라리 스님들이 계율을 어겨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당장 위기에 처한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호국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호국불교가 존경받는 점은 행동이 필요한 때는 머뭇거림 없이 즉시 실천하여 모든 걸 던진다는 데 있다.

호국불교, 이 빛나는 전통이 10·27 법난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아마 중생이 불교를 필요로 하는 때와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 상대가 누구든 불자로서의 양심과 용기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저 둘은 닮은 것이다. 또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불구덩이에 내던졌다는 점에서도 겹친다. 그런 점에서 ‘10·27 법난’은 ‘호국법난’이라는 별칭을 얻어야 마땅할 성싶다. 10·27 법난은 나라와 중생을 지키고자 불교계가 불의에 항거하다 벌어진 비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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